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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신뢰
    저자
    랠프 월도 에머슨 지음 ; 전미영 옮김
    출판사
    창해
    발행연도
    2016
    작성자
    김**
    작성일
    202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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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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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신뢰>> 랠프 월도 에머슨 지음. 전미영옮김. 창해

    책 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선명하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것, 즉 자기신뢰야말로 성공의 제1비결이다//. 여기에서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글쎄 이 책에 꼭 이런 문구가 어울릴까? 표지 아래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애독서/라는 광고 문구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 버락 오마바는 한국 사람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위인으로 대접받고 있는 모양이다. 비결이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자기만의 뛰어난 방법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비결이 이렇게 세상에 오픈되어 버리면 더 이상 비결이 아닐 것 같은 우려는 있다. 에머슨의 글을 언제 읽어 보았든가? 전에 생태 철학이 주목받고, <녹색평론>이라는 잡지가 인기를 끌고, 그 후 생태 철학이 많이 소개될 때 이름 정도는 들어본 것 같기는 하다. 생태 철학자로 소개된 작가가 어떤 경로와 과정을 거쳐 성공의 비결을 전하는 철학자로 바뀌었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에머슨이라는 작가을 더 알기 위해서는 그의 대한 정보도 많아야 하고,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건도 안 되고, 그럴 의지도 없다. 단지 지금은 오늘 단숨에 읽어버린 이 책에 대한 느낌을 몇 자 적어보고, 몇 가지 비판적 인상을 적어볼 수 있을 뿐이다. 순전히 엉터리 주장을 해본다는 의미다. 에머슨을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지한 자의 헛소리로 들릴 것이 분명하리라. 하지만 에머슨은 자기를 신뢰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내게 비난을 퍼붓는다면, 난 이렇게 외치겠다. 나는 나를 신뢰한다. 당신이 무엇이라 하든.

    습관적으로 reliance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보았다. 신뢰, 의지, 의존 등의 뜻이 있다. self-reliance는 자립, 자기 신뢰, 자기 의존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부드럽게 표현하면 너 자신을 믿어라, 이고 강하게 표현하면 오직 너 자신만을 믿어라, 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겠다 싶다. 내 느낌에는 이 책은 후자에 더 방점을 찍을 수 있겠다 싶다. 어차피 시비를 걸 참이니, 나는 이 주장을 어차피 너 자신 말고 아무것도 신뢰하지 말라는 의미로 읽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자기신뢰의 반대는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뉘앙스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주장이 조금 이상하였다. 오직 나만 믿어야 하는 세상은 불행한 사회가 아닐까 싶다. 이웃을 믿고, 모르는 사람들의 선의를 신뢰하고, 사회에 의존할 수 없다면 불신 사회가 아닌가. 즉 불신사회에서는 오직 믿을 것은 자기신뢰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런 주장이 터무니 없다라고 할 수 있어, 에머슨의 글을 옮겨 본다. //사회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인간다움을 빼앗으려 음모를 꾸민다. 사회는 일종의 주식회사다. 그 속에서 각각의 주주들은 자신이 먹을 빵을 더 확실히 보장받는 대신, 그 대가로 자유와 교양을 넘겨주기로 합의한 셈이다. 거기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은 순응이다. 자기신뢰는 혐오의 대상이다. 사회는 본질과 창조성이 아니라 명목과 관습을 사랑한다.// 여기에 대항하여 에머슨은 고립과 자급자족, 자기신뢰, 귀족적 태도 등을 강조하는 듯하다. 자연, 어린아이, 영성 등이 자기신뢰의 기반이 되는 듯하다. 그런데 에머슨 당시에 사회에 무슨 변고가 있어 그는 사회를 그렇게 불신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당시 미국 사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검색해 보았다. 영토 확장 전쟁, 서부 개척, 미국 멕시코 전쟁, 남북전쟁, 경제 성장과 산업혁명 등이 검색되었다. 전쟁과 살육의 시대고, 황금과 사치와 천박함이, 경제성장과 산업화는 종교적 영성을 밀어내고, 농업을 파괴하고 자연을 개조하고 하는 시대가 아니었을까? 이 ‘혼돈’과 ‘어둠’에서 사람들은 ‘순응’를 바람직한 덕목으로 생각할 때, 에머슨은 이런 것들에 환멸을 느껴 ‘자기신뢰’ ‘초월적 운명’ ‘정신의 고결함과 신성’ ‘기분 내키는 대로’ ‘나는 확실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다’ 를 목청껏 노래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고립되고 자급자족하는 작은 영지의 귀족주의를 요구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외치는 ‘자기신뢰’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즉 한 인간이 정말 자신을 신뢰할 정도로 완전한가? 근거가 될 수 있는 주장을 추론하여 나열해 보면, ‘//참된 인간이 있는 곳에는 자연이 있다//, //참된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원인이고, 국가이고, 시대이다// ’자발성‘ ’본능‘ ’직관‘ ’영감‘이다. 그리고 그는 놀라운 주장을 한다. //’진리‘와 ’정의‘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저 스스로의 존재함을 인식하고----// //영혼이 존재하는 한 힘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언가에 의지하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 활동하는 힘이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만물의 속성‘이 가진 근원이다// ’스스로 존재‘ ’스스로 활동‘ ’만물의 속성‘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바로 이런 존재, 즉 신적인 존재이니 자기를 신뢰하라는 주장이다. 그는 사회가 국가가 근대화가 이런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다고 하는 듯하다.

    에머슨의 ’문명‘비판에 대해서는 경청할 만하다, 그가 성공 철학자로 읽히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으로 읽히기도 한다. 한국 종교철학자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같은 버전으로 들리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자기를 신뢰하는 강한 현을 갖게 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이 거기에 맞춰 울릴 것이다// 함석헌의 씨알론을 연상시킨다.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이란 사회는 자기 신뢰나 자기애가 부족한 세상이 아니라, 넘치고 넘쳐 개인의 자기애를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인간의 ’영성‘을 해체하고 파괴하는 문명에는 대단히 관대하거나 마음껏 향유하면서 자기를 신뢰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사회가 아닌가 싶다. 21세기 에머슨이 한국에 태어났다면 뭐라고 할까? 텔레비전만 틀면 ’트로트‘음악 채널이 수십 개가 나오듯이. 자기애를 부르짖고 자기 신뢰를 광고처럼 내보내는 프로가 방송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한국인들은 자기 신뢰나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가? 새로운 행복론이 유행할 때마다 좀비처럼 우루루 몰려 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질문해 볼 일이다. 사실 문자만을 놓고 보면 자기 신뢰나 자기 계발, 무수한 행복에 대한 담론 등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개인의 절박한 몸부림이 아닐까. 그만큼 환경이 척박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위협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모래에 묻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행복‘을 찾아 이리저리 쉴새 없이 기웃거리고 있지는 않는가? 에머슨에게 한 개인은 ’만물의 근원‘이고 세계는 그를 중심에 놓고 공전한다. 그래서 에머슨은 여행을 하지 않고, 그의 작은 오두막에서 소박하고 단순하게 살아간다. 그곳이 우주의 중심이니까. 자기 신뢰는 누구에게 전수 받거나 배울 수 있는 덕목이 아니다. 그가 자기의 본성이나 영성을 인식할 수만 있다면, 사실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던가, 영성이 있다라는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닐 것이다. 과학 이전의 시대, ’근대‘이전에는 널리 퍼진 세계관이다. 집에도 마을에도 동네 어귀에도 사람에게도 영성이 충만한 시대였다. 에머슨이 살 당시에 미국은 엄청난 역사적 격변기였다. 한 개인이 그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혼돈의 시기였을 것이다. 마국의 어느 시골에 살던 에머슨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어느 시대고 격변기에 사는 지식인들은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누구는 혁명에 투신하고, 누구는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고, 누구는 순응을 하고, 누구는 동조자가 되기도 한다. 에머슨은 ’자기신뢰‘라는 가치를 지닌 체 작은 오두막에서 사는 삶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21세기 글로벌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우리가 에머슨이나, 소로우처럼 빈 장소를 찾을 수 있을까. 더 이상 도망치거나 숨을 곳이 없는 21세기 인간들은 오늘도 ’행복‘을 쇼핑하기 위해 명품관이나 맛집을 헤매며 월든 숲을 찾아 다니는 존재는 아닐까. 에머슨은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아무리 쏘다녀 보아라. 소용 없다. 당신의 내면에 평화가 있다. 그러나 상업화 된 이 세계는 ’마음‘까지도 상품으로 만들어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 상품을 사기 위해 헤매지 말라. 당신이 세상의 중심이다. 에머슨은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제기하는 듯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없지 않을까. 우리는 18세기 에머슨이 살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가 엮여 있다. 더 이상 바깥은 없다. 19세기에 에머슨이 미국에 살면서 ’자기를 신뢰하라‘고 하였다면, 21세기 에머슨은 ’사회를 변화시켜라‘라고 하지 않았을까? 랠프 왈도 에머슨을 읽자, 내가 읽고 싶은 에머슨이 아니라.

  • 녹색 자본론
    저자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 구혜원 옮김
    출판사
    북드라망
    발행연도
    2025
    작성자
    김**
    작성일
    202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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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 자본론>> 나카자와 신이치. 구혜원 옮김. 북드리망

    나카자와 신이치는 <불교가 좋다>라는 책으로 처음 만났다. 지금도 그 책은 책꽂이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대칭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보였다. 이 책에서도 대칭성이 깨진 세상의 실태를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다. 작은 책이지만, 몇 번이고 읽었다. 읽고 또 읽을 값어치가 있다. 책은 세 주제와 하나의 부록으로 엮였다. 압도적 비대칭(테러와 광우병에 대하여), 녹색 자본론(이슬람을 위하여), 슈토크하우젠 사건(안전영역에 포섭된 예술의 시련), 부록으로 모노와의 동맹(증식, 생명, 자본주의) 다. 한 번 읽어서는 전혀알 수 없었고, 세 번 정도 읽은 듯하다. 모노와의 동맹은 딱 한 번 읽었는데, 그만 읽을 예정이다. 내용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 용량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편하고 익숙한 것이 아니라, 나를 한계상황에 내몰거나 경계 바깥으로 던져버리는 책들만이 가치가 있다. 이 책을 읽는 행위는 안전영역을 지키려는 관성과 낯선 세계를 배척하고 불쾌함과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나와의 싸움이었다. 신이치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아마도 ‘대칭성’을 회복하기 위한 몸짓이 아닐까? 나는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고, 자본주의가 정점인 국가에 거주하며, 서구의 합리성과 그들의 종교나 사고의 자력 안에서 교육받고 자랐으며, 인류를 위협하는 기후위기에도 흥청망청 소비를 권정하는 사회에서 비교적 안전한 영역에서 쾌락을 향유하는 압도적 비대칭 구조에서 살아가고 있다. 가난한 나라가 있고,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이슬람 경제 시스템이 있고, 삼위일체적 사고가 아니라, 유일신 원리를 따르는 이슬람이 있고, 서구의 침략과 고립 정책에 불안에 떠는 세계가 있고, 테러와 공포가 있는 세계가 저편에 있다. 저자는 인류는 세계를 뒤덮은 압도적 비대칭을 내부로부터 해체하는 지혜를 낳을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 그리고 또 묻는다. 이렇게 말하는 지성은 과연 무력한 것일까? //‘제국’은,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생물의 생태가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곳이다.--그러나 쾌락원칙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이러한 안전영역 내부에서 종교는 타락하고 예술은 퇴폐한다. 혹은 그 의미를 잃는다. 그때 인간도 정체와 퇴폐에 빠진다// 행복은 쾌락을 탐하고, 지성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인가.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고통이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통해 우리는 대칭적 사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녹색 자본론>을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 대한 분노에서 썼다고 하였다. ‘녹색 자본론’이 생소한데, 한국식 정서로 녹색은 ‘생태’ 정도의 의미로 읽히고, 자본론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원용한 듯 하다. 새로운 자본론을 이슬람의 타우히드 교리에 따른 자본론이라고 한다. 마르크스 자본론은 삼위일체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석한다. 역사상 존재하는 일신교는 유대교, 카톨릭, 이슬람이 대표적인데, 현재 글로벌한 자본주의는 카톨릭의 삼위일체론 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스콜라철학-중상주의, 중농주의-애덤 스미스-칼마르크스로 이어지는 계보라고 한다. 만약 이슬람 경제 시스템이 존재한다면 이슬람은 전혀 다른 계통을 따른다고 한다. 타이우드(유일신, 신은 오직 하나, 일자, 一化) 교리나 윤리에 바탕하여 경제를 운용한다고 한다. 이들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이자에 대한 선택이고, 화폐에 대한 관점이라고 한다. 화폐가 자본이 되기 위해서는 이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현재 자본주의 모습이라면, 이슬람 경제는 화폐에 대한 이자를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슬람은 자본주의를 혐오하고 자신들의 세계에 그것이 침투하는 것을 중대한 악으로 본다. 원리에 있어서 이슬람은. 이윤을 낳는 풍요로운 사회를 거부하면서까지 의미로 가득 찬 세계를 선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우리는 단지 결론이 아니라, 저자의 논리를 하나하나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것을 지성의 거대한 모험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원리로서의 이슬람은 거대한 한 권의 살아 있는 ‘녹색 자본론’이다/ 이 논평을 이끌기 위해 긴 여정을 거쳐야 한다. 그 지성의 모험이 가히 매력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다섯 개의 챕터와 하나의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1-일신교를 둘러싼 인식론 수업 : 일신교는 늘 자기증식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신교에서 자기증식은 오직 일자 즉 유일신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생성하지 않는, 늘어나지 않는, 줄어들지 않는, 조건 지어지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계속된 근원적 ‘초월’ 상태를 발견해 ‘일(一 )이라고 부른다.--- 인지론적 차원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비약을 종교적,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일신교‘의 성립이라 할 수 있다//.

    2-이자를 부정하는 이슬람 : //일신교의 ’기호‘원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율법서 출애굽기). 일신교의 원리에서 상징계(신의 로고스)와 현실계는 일체여야 한다. 해서 일신교는 상징계와 현실계를 어긋나게 하는 것들을 극도로 경계하고 금지한다고 한다. 상징계가 상상계로 작동하면 우상숭배가 된다고 한다. 단순하게 하면 상상계는 자기증식하여 상징계(신의 로고스)에서 이탈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화폐는 사물의 대용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즉 화폐라는 상징계는 사물이라는 현실계와 일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폐가 사물의 대용이 아니라, 독자적 지위를 갖거나, 화폐가 화폐를 낳기 시작하면 상상계와 현실계를 잇는 이음새가 어긋나고, 이자를 인정하면 화폐는 스스로 자기증식하는 것이 된고 만다. 이는 일신교(오직 스스로 자기증식하는 것은 일자인 신 뿐 인) 교리에 맞지 않다고 보아 이슬람 경제에서는 이자를 금지한다고 한다. 13세기에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있을 때 카톨릭과 이슬람은 다른 선택을 한다. 이슬람은 이자를 금지하고, 카톨릭은 이자를 인정한다. 이런 모습을, 동방의 이슬람은 의혹 어린 눈길로 응시하였다고 한다. 이슬람 관점에서는 서구의 카톨릭이 유일신의 원리를 훼손하고 있다고 의심한다는 것이다

    번거롭고 복잡하고 어렵지만, 우리는 이런 과정을 따라가야 한다. 결코 그 어떤 것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거니와 인간의 삶이란 ’만들어진‘ 역사 위에 서 있다. 이런 과정을 같이 하지 않으면 도그마에 빠질 수 있고, 무턱대고 수학 공식만 외우는 꼴이 되기싶다. 뭔가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어주 많은 것들이 축적되고, 분류되고, 분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3-타우히드 화폐론 : //오랫동안 이슬람 세계에서는 자본주의가 형성되지 않았다. 이자는 자본주의의 원자다. 이 원자를 발생의 단계에서 ’분자 차원‘의 개혁을 통해, 이슬람은 화폐 증식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출현을 막아 왔다// //이슬람의 화폐론은 일신교인 이슬람적 ’타우히드‘ 구조를 따라 구축되며, 가톨릭적 화폐론은 일신교인 그리스도교적 사고 방식인 ’삼위일체‘적 구조에 의거하여 작동한다// ’타우히드‘ 구조에 따른 세계의 이해는 //’일자‘에 의한 一化// 라고 한다. 즉 모든 것은 알라의 뜻이다. 증식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신의 의지만 있을 뿐이다. 일화. 화폐가 사물과의 직접적 연결을 잃고, 스스로 증식하는 이자를 엄격히 금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4-성령은 증식한다 : //증식성은 그리스도교 원리 안에서 굳건하게 정립된 것이다.---그리스도교는 이런 유형의 증식이 그 신학의 중심부에 정립되어 있고, 또한 그것에 대응하는 현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원리란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과 화폐 발달에 대한 관계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지만, 어렵기도 하고 설명할 역량이 없다. 다만 저자는 //그리스도교는 ’아버지‘가 ’아들‘을 산출하고 ’성령‘이 발출되는 ’삼위일체론‘을 일신교적 기호론의 기초로 설정했고, 이러한 구조 때문에 자본주의와 지극히 친화적이다// 라고 한다. 즉 ’삼위일체론‘의 신과 화폐의 자기 운동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고, 화폐가 자기증식하는 자본주의에 신학적 종교적 이론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5-마르크스이 ’성령‘ : //고전파 경제학의 자본 이해에는 ’삼위일체‘ 논리 구조가 잠복하고 있다// 고전파 경제학은 스콜라 경제이론에서 중상주의 중농주의를 거쳐 애덤 스미스까지 이어지는 경제학이라 한다. 저자에 의하면 고전파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려 한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인데, 마르크스는 ’삼위일체‘적 사고 방식을 완전히 상대화시켜, 새로운 ’외부의‘ 방식으로 경제 현상을 분석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삼위일체론‘적사고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상품에 내재한 ’성령‘적 활동을 제거할 수 없어, 그것을 출발점으로 자본 분석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자본론/의 분석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대신 자본주의의 ’외부‘로 탈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삼위일체론‘적 사고에 갇혀 버렸다고 한다. 마치 손오공이 아무리 재주가 출중하여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식이다.

    //이슬람에는 인간의 자연적 지성이 만들어 내고야 만 세계에 대해 하나의 투철한 비판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슬람이란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경제학 비판‘인 것이다. 원리로서의 이슬람은 거대한 한 권의 ’녹색 자본론‘이다. 자본주의의 ’타자‘는 이 지구상에 실재한다. 이슬람은 우리의 세계에 있어 잃어서는 안되는 거울이다//

    어쩌면 저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외부‘가 이슬람의 ’타우히드‘적 사고가 되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하는 듯하다. 요즘 가장 붐비는 병원은 정신과라는 말이 회자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고도 전한다. 자본주의의 경이적인 확대와 정신분열증적 문명은 수상한 관련성을 이어 나가며 발달해 왔다고 한다. 글로벌한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흥분과 욕망은 정신분열적 문명을 낳고, 인류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고, 사람들은 이 풍요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부유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러한 현대를 생각 없이 살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 (아벨이 들려주는) 인수분해 1 이야기
    저자
    정규성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연도
    2011
    작성자
    김**
    작성일
    202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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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벨이 들려주는 인수분해1 이야기>>

    수학책을 더 읽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매 번 고민이다. 시험 준비도 아니고, 직업적으로 써 먹을 일도 없고, 유행하는 ‘자기만족’이나 ‘자기위로’ 따위도 생길 리 없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도 힘들고, 금방 알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잊어 버린다. 수학책을 읽을 시간에 다른 책을 읽으면 더 큰 재미와 만족을 얻을 수 있을 듯도 하다. 마땅한 이유도 없는데 수학책을 왜 읽을까.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내 자신을 속일 필요가 있다. 세상을 속이기 위해 우선 내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이외의 세상을 알기 위해서다. 주관이 아니라 객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개인과 ‘자아’가 강조되고, 논리나 보편성보다 정서나 다양성이 더 주목받는 시대다. 나를 알고, 나를 이해하고, 나에게 선물을 주는 시대이다. 타자와 세상을 알고 싶고, 논리나 구조나 보편성을 이해하고 싶어서 수학책을 읽는다. 감정과 정서를 알아가는 만족감과 즐거움도 있겠지만, 이성과 구조를 아는 즐거움도 그에 못지 않다. 내 주변의 좋은 일을 보면 기쁘며, 죽음을 보면 슬퍼한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면 감정의 동요는 훨씬 줄어든다. ‘죽음’은 개인적 서사가 아니라 보편적 법칙이 된다. 죽음은 내 감정과 정서에 상관없이 객관적이다. 개인적으로 수학책을 읽는 이유는 감정과 정서에 매몰될지 모르는 사고에 균형추를 달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세계(나 이외의 대상)를 알아야 내 생존에 유리하리란 판단도 있을 것이다. 나를 단련하는 방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무도이고 쿵푸이고, 공부이기도 하다.

    예전 도서관에서 이차방정식을 풀다가 하도 답답하여 앞에 앉은 여학생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 학생은 공식을 대입하여 단 번에 문제를 해결해 버렸다. 사실 나는 그 학생에게 정답이 아니라, 이 공식이 왜 나왔는지를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공식을 외워서 답은 찾을 수 있지만, 원리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수학이 아니라 사실은 정답 맞추기 놀이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차방정식을 인수분해로 푸는 문제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의문이 상당히 해소되었다. 5장 복잡한 다항식의 인수분해는 한 번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6장 세 항 이상의 완전제곱식과 고차식의 인수분해는 한 번 훑어 보는 것으로 마쳤다. 어렵고 힘들어서다. 굳이 5장 6장을 이해하려고 노력은 할 수 있겠지만, 그 대가로 1월 내내 울상이 되어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열심히 읽었다. 수학은 감정과 정서에 기반한 學이 아니므로, 나는 또 인수분해를 세세하게 적어야 한다. 영어 단어를 외우기 위해 몇 번이고 노트에 필사해 보듯이 해야 한다. ‘수학에는 왕도가 없다’ 여기에 써보면서 한 번 더 복습과 반복을 해야한다. 다른 방도가 없다.

    /수학에서는 퍼즐과 같이 잘 정리한 후 문제를 해결하면 쉽게 풀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다항식을 두 개 이상의 단항식이나 다항식의 곱의 꼴로 고치는 것을 인수분해한다고 한다. 각각의 식을 정수에서와 마찬가지로 처음 식의 인수라고 한다. x²+3x+2를 인수분해 하면 (x+1) (x+2) 다. (x+1), (x+2)가 인수이다. 반대로 행하는 것은 전개한다고 한다. 먼저 공통인수를 통해 인수분해하기가 있다. 공통인수는 두 항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수나, 문자를 말한다. ax-bx=x(a-b). xy+x²=x(y+x)와 같이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알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사각형으로 나태내 볼 수 있다. xy는 가로가 y이고 세로가 x인 직사각형이고, x²는 가로 세로가 같은 정사각형이다. 이 두 개의 사각형을 연결하면 가로 y+x. 세로 x의 사각형을 만들 수 있다.이 사각형의 넓이는 x(x*y)다. 즉 x*x=x²하나와 x*y=xy 넓이를 합친 넓이가 된다.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으면 바로 알 수있는데, 아직 도형을 표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글로써 설명하고 있다. 즉 인수분해를 도형으로 나타내면 그 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완전제곱식의 인수분해가 있다. 제곱식의 다항식을 다른 다항식의 제곱으로 나태내는 방식이다. a²+2ab+b²=(a+b)²이다. 우선 이해를 위해서 (a+1)²를 전개하면 (a+1) (a+1)이 되고 이 식을 곱셈으로 하면 a²+a+a+1=a²+2a+1이다.그럼 a²+2ab+b²를 사각형 도형으로 표현해 보자. 한 변의 길이가 a인 정사각형 1개, 두 변의 길이가 각각 a,b인 직사각형 두 개, 한 변의 길이가 b인 정사각형 1개로 나타낼 수 있다. 색종이로 오려서 네 개의 사각형을 붙이면 다른 사각형을 만들 수 있다. 그 만들어진 사각형은 가로가 a+b고 세로가 a+b가 된다. 이 넓이는 (a+b)²이 된다. 다항식을 이렇게 도형으로 나타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해서 a²∓2ab+b²=(a∓b)² 공식이 된다. 다음으론 합과 차의 곱으로 된 다항식을 완전제곱식으로 인수분해 하는 방식이다. 합은 덧셈, 차는 뺄셈을 말하고 이 두 항은 곱하기로 된 다항식을 이른다. (a+b) (a-b)= a²-ab+ab-b²=a²-b²이 된다. 이것도 사각형 도형으로 나타내면 쉽게 알 수 있다. 가로세로인 정사각형 넓이 a²가 있고, 가로세로 ab사각형은 더하기 빼기로 상쇄되고, 가로세로가 b인 정사각형 b²가 있고, 이것의 넓이는 a²-b²이 된다. 해서 a²-b²=(a+b) (a-b) 인수분해 공식이 성립한다. 합과 곱을 이용한 인수분해 공식은 x²+(a+b)x+ab=(x+a) (x+b)이다. 또 acx²+(ad+bc)x+bd= (ax+b) (cx+d) 이다. 갈수록 복잡해져 가지만 원리는 비슷해 보인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지나다가 수학은 또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질적 전환을 하기도 하는 듯하다. 단지 인수분해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용되고, 서로 연결된다.

    수학책을 읽으면서 더 많이 드는 생각은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면 더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수학의 천재라는 가우스는 ‘모든 다항식은 일차식과 이차식으로 인수분해 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수많은 수학자가 연구 중이라고 한다. 어떻든 내 입장에서는 더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 인수분해를 하는 듯하다. 마치 집안에 어지럽게 널린 가구들이나 물건들을 정리하는 기술이나, 방법 같기도 하다. 수학은 어렵다.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 때로는 짜증도 나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고통이 불편이 나를 깨우치고 넓히고 하는 것이 아닐까. 집 밖이 고통스럽고 불편하다고 집에만 머문다면 내 세계는 감옥에 갇힌 꼴이 될 것이다. 그 감옥에서 내가 왕이라고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학을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처럼 생각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 여행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지만 낯선 세계 앞에서의 곤혹감일 수도 있다. 수학이 좋은 점 중 하나는 아무런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모르는 세상을 여행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깊은 마음의 생태학 = (An)Ecology of deep mind :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저자
    김우창 지음
    출판사
    김영사
    발행연도
    2014
    작성자
    김**
    작성일
    2026.01.07
    평가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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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마음의 생태학(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김우창 지음. 감영사

    //우리 마음의 무한한 가능성을 희생함으로써 전문적인 직업과 특정한 의무에 헌신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외면하고 살고 있다. 우리의 욕망을 위해 내버린 시간들-이익과 경제적 가치의 관점에서 값 없다고 버려버린 숱한 그 시간- 그 무가치를 무릅쓰고 그러한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운 좋게도 일하는 중 비는 시간이 조금 있다. 책 한 권을 책상 아래 놓아두고 꺼내 읽곤 한다. 틈나는대로 아주 조금씩 읽기도 하고, 며칠 들여다보지 못할 때도 있다. 꽤 오랜 시간 책상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던 책을 비로소 집으로 이송했다. 한 번만 읽었을 때는 약간 시시하였다. 다시 읽었을 때 깊은 울림이 있었다. 지금은 할 수 있다면 읽은 책을 두 번 정도 읽으려고 노력한다.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읽어야 깊이를 조금 맛볼 수 있다. 2차원은 평면이고 너비만 있고, 3차원은 입체이고 깊이가 있다. 읽은 책 권수가 아니라 이제는 중량감을 체험하고 싶다. 가볍고 날렵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깊이를 추구하고 싶다. 된장도 김치도 제 맛을 내려면 오래 묶어야 한다지 않는가. 패스트푸드와 패스트책이 범람하는 듯하다. 언제적부터인지 확실치 않지만, 일과 중 점심을 근처 프랜차이즈 식당이 아니라, 멀고 번거롭지만 프랜차이즈가 아닌 식당을 물색하여 한 끼를 해결하곤 한다. 이런 식당들이 외곽으로 밀려난지는 꽤 된 듯하다. 건강을 위해서나 미식 취미 때문이 아니라, 우선 달고 짜고 맛있는 음식이 불편해졌다. 그곳에는 아르바이트생이 정해진 레시피에 따라 만든 음식이 아니라, 나이 지긋한 주인이 있고, 오랜 체험과 솜씨로 만든 음식이 있는 듯하다. 혀가 아니라 속을 달래 줄 음식. 현실적 여건이 되고, 참고 견딜 힘이 남아 있다면 김우창이 쓴 전집 모두를 읽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달랑 한 권의 책을 읽고 김우창의 사유를 읽어낼 수가 없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한 인간을 읽어낼 수 없는 이치와 상통하지 않을까 싶다. 깊은 사고와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깊이를 위해서는 숱한 시간을 버려야 하고, 무가치를 무릅써야 한다. 이것을 감내할 수 있을까. 어쩌면 김우창의 사유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해도 된다. 그의 책을 들고 오랫동안 혼자 앉아서 시간을 버리고 무가치를 무릅쓸 수 있다면 그것이 더 가치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해서는 언제까지나 기다려야 한다. 바쁜 현대인에게는 한가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김우창은 한량들을 독자로 하여 책을 쓴 게 아니라,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글을 새긴다. 다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는가. 이 책은 단연코 ‘인간’에 대해 썼고, 그 인간의 ‘마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이다. 그 인간은 생물적 인간도 물리적 물질적 인간도 아니다. 그냥 ‘인간’이자, 마음을 가진 인간이다.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다. 인간의 수많은 속성과 특징을 가진 생명체이다. 어느 화가가 인간을 눈으로만 표현 하듯이, 이 시대는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만 주조하지 않았나 싶다. 다른 모든 특성들은 종속변수다.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나를 철저하게 경제적 동물로 개조할 수 있다면 차라리 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고뇌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강대국이 전쟁로봇을 개발하느라 경쟁한다는 소식을 자주 접한다. 전쟁로봇은 사람을 살상할 때 단지 제거해야 할 목표로만 간주하지 인명 살상에 대한 고민과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경제동물로 개조되면 도덕이나 윤리나 마음의 문제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은 경제동물로 완전히 제조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생명체는 ‘정신’을 지녔기에 불가능할까. 그러나 인간을 경제동물로 개조한다는 의미는 몸이 아니라, 정신을 경제동물화 한다는 의미리라. 김우창은 책 전체에서 정신이란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고 ‘마음’이라는 말은 숱하게 쓴다. 우리에게는 이 마음이 있기에 불가능하다고도 하는 듯하고, 마음만이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도 하는 듯하다. 정신과 육체라고 하면 정신은 따로 떼어낼 수 있다는 뉘앙스를 주지만, 마음은 인간의 구성요소이자 내재된 기관 같은 느낌이다. 즉 인간에게 마음이 없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는 듯하다. 생물학자가 세포니 DNA에 대해, 물리학자가 원자나 분자에 대해, 인문학자인 김우창은 마음에 대해 탐구한다. 세포,원자 등은 과학-과학적 사고-이라면, 마음에 태한 탐구는 그래서 생태학인가? 깊은 마음의 생태학. //깊이의 생태학은 삶과 마음가짐을 산업주의와 기술문명의 테두리에서 빼어 내어 근원적인 것으로 복귀시켜야 한다고 본다.----오늘의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크게 보고 깊이 생각하는 일이라는 것이다.-----우리의 삶에서 잃어버린 것은 깊이에 대한 감각이다.// 김우창의 사유에 대해 물어봐야 소용 없다.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김우창을 읽는다는 것이 바로 깊은 마음의 근원을 찾는 여정이고 구도의 과정이다.

  • (카르다노가 들려주는) 확률 1 이야기
    저자
    김하얀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연도
    2008
    작성자
    김**
    작성일
    2025.12.27
    평가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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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다노가 들려주는 확률 1 이야기>> 김하얀 지음. 자음과 모음

    언제 읽나 걱정만 하다가 반납일이 임박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초등학교 수준의 내용이라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나의 수학 수준은 아직도 초등학교에 머물러 있다. 어느날부터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고 있다. 대신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보고 있고 듣는 시간이 늘었다. 눈도 침침하고, 그 또한 지루하고 때로는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여 이용을 자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쉽지가 않다. 밤은 길고 일상은 그만큼 늘어졌다. 마땅한 오락거리가 부재하니 SNS로 달래고 있었다. 달리 배운 것이 없기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지 않는다면 책을 읽거나 뭔가를 써야 한다. 남들은 뭣들 하고 사는지 늘 궁금하다. 스마트폰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지고 더 많은 품이 들어 게으름을 피우는 날이 많다. 뭐든 읽어야 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써야 한다. 이 책에 소개된 카르다노는 수학자이자 의사이며 사진기의 선구자이며 물리학자다. 특히 대수학에서의 업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1501년에 태어나서 1576년까지 살았으니,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학문이 세부적으로 전문화되지 못하여 여러 방면에 직을 가지고 있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어 보인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전문가의 시대가 아니라 ‘학자’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전문가가 한 가지 일에 정통하다면, 학자는 전반적인 지식에 관여하는 자라는 의미로 학문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달리 생각해 보면 수학이란 학문이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지식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지식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전문지식이 아니라, 교양으로서 지식. 입학하면 쓰기와 읽기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수학(수의 대한 지식)을 같이 배운다. 읽기와 쓰기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사실 수에 대한 지식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익히고 훈련되어 왔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 아니라, 어른으로 길러지듯이, 이런 교육을 통해서 ‘근대인’이 되었던 것이다. 근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읽기와 쓰기 못지 않게 수학적 사고가 그만큼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다.

    확률이란 시험과목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어떤 현상을 선택하고 예측, 판단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편리한 도구라고 한다. 점쟁이가 치는 점이나 선거 때 실시하는 여론 조사도 사실 일종의 확률이라고 할 수 있다. 확률은 도박에서 예측을 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도 한다. 확률이란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수로 나타낸 것이다. 누구나 예측을 하고 살지만, 늘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척도의 의미를 가진 수로 나타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모두 시간을 살지만, 시간을 개인의 감각이나 천체의 위치나 기온의 변화로만 짐작하기 보다는 척도로서 수로 나타낼 수 있다면 오차도 줄일 수 있고, 갈등도 피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하고, 공통의 기준을 마련할 수도 있게 된다. 사회의 규모가 커지거나, 다스리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면 반드시 필요한 도구가 수학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실 현대사회의 복잡함이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돌아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수학이 있어 가능할지도 모른다. 확률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같은 조건 아래에서 실험이나 관찰이 이뤄져야 하고, 그 관찰이나 실험이 횟수가 많아져서 일정한 값에 가까워져야 한다. 주사위의 모양이 같아야 하고, 1이 나올 확률을 알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이 던져보아야 한다. 그런데 수없이 많이 던져보는 대신 어떤 법칙을 발견하기만 하면 확률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 법칙이나 패턴을 발견하는 것이 아마도 수학이 아닐까? 수학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은 수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물론 수학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 이 과정은 지루하고 재미없어 보이지만, 이것을 생략하면 앞으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이런 사적인 글을 쓰며 느낀 것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어와 어휘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 쓸수록 사전을 찾아보는 일이 더 잦아졌다. 번거롭지만 반드시 이런 것들을 다시 한 번 새겨 넣어야 한다. @어떤 시행에서 각 경우가 일어날 가능성이 같다면 어떤 사건 A가 일어날 확률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사건 A가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다. 또 이런 약속도 해야 한다. 1) 반드시 일어나는 사건의 확률은 1. 2)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의 확률은 0. 3) 어떤 사건의 확률을 P라고 하면, P는 ㅇ과 1사이에 있다. 사건 A가 일어날 확률을 P라 하면, 사건A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은 1-P라고 할 수 있다. @사건 A,B가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때, 사건 A 또는 B가 일어날 확률은 (사건 A가 일어날 확률) + (사건 B가 일어날 확률). @사건A, B가 서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경우, 사건 A,B가 동시에 일어날 확률은 (사건 A가 일어날 확률) * (사건 B가 일어날 확률)이다.

    아무리 정교한 확률의 이론을 세우더라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지나간 일들과 내일은 똑같은 조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날씨도 다르고, 기분도 달라지고, 경제적 조건, 관계도 같은 조건 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확률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같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는다. 가령 조건이 100가지라면 맞지 않는 조건을 제거하여 30가지만 남겨서 그 조건으로 예측하거나, 가능한 한 많은 자료(200가지)를 얻어서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다. 첫 번째 방법은 억지와 신념일 수 있고 희망이나 기적에 기대하기에 가깝거나, 현실을 임의로 조작하는 결과를 가져와 예측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방법은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지 않을가. 더 많은 것들을 참조할 수 있어서다. 확률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지만, 예측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다. 적어도 실패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수학은 차가운 학문이다. 우리 사회는 열에 들 뜬 환자처럼 모두들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수학이라는 차가운 욕조에 머리를 적셔 냉정한 사고를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름다움은 열정에서가 아니라 이런 차가움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정확한 동작과 절도 있는 자세에서 아름다운 몸짓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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