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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가 들려주는) 삼각비 1 이야기
    저자
    허인표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연도
    2011
    작성자
    김**
    작성일
    2026.07.07
    평가점수
    평가점수

    3

    공감수

    <<프톨레마이오스가 들려주는 삼각비1 이야기>> 허인표 지음. 자음과 모음.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교류를 즐기지 않거나, 비교적 시간이 남는 사람들에게 수학을 공부하기를 권해본다. 처음에는 지루하고 재미없고 짜증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만약 당신이 수학에 뚜렷한 재능이 없으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수학을 공부한다면, 짜증은 내내 계속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한다면 가끔은 즐거움도 얻을 수 있으리라. 수학을 공부하는 것은 텃밭 가꾸기와 비슷하다. 한 번 심거나 가꾼다고 영원히 가거나 지속되지 않는다. 매년 매달 매일 새로운 작물을 심고 돌보고 수확해야 한다. 정성을 들인 만큼 보람이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즐겨야 하리. 언제까지 나의 텃밭을 가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심정으로 앞으로의 수학 텃밭을 대할 생각이다. 수학은 그렇고, 내게 주어진 이 삶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메마르면 물을 주고, 가뭄에는 하늘에 빌고, 홍수가 나면 나의 과오를 성찰하고, 남으면 다른 이와 나누고, 거름을 주며 정성스럽게 가꾸어 보야야 할 것 같다. 텃밭 가꾸기와 수학 공부하기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다르면서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아침에 들었다. 노모는 굽은 허리와 아픈 관절로 텃밭 고랑을 호미로 파며 ‘아이고’하며, 젊은 나는 분노와 슬픔과 회한과 무의미라는 호미로 글의 고랑에 엎드려 끙끙 앓는다.

    프톨레마이어스는 서기 85년 경 그리스 사람으로 그들의 우주관과 기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기하학 분야에서 새로운 증명과 정리를 만들었고, 천구면에 있는 점을 수평면, 자오선면, 수직면으로 구성되는 서로 직각인 3개의 평면에 사상하는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기하학을 공부하다 누구나 우주에도 적용해 보고자 하는 것 같다. 고대에서 기하학자는 천문학자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하늘을 거대한 평면으로 보고 기하학적 지식을 실험하거나 적용해 보았지 않았을까. 그가 천구면을 직각삼각형으로 구성하려고 한 것이 삼각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가장 기초적인 삼각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몇 가지 사전 지식이나 전제가 필요하다. 바로 삼각비로 들어가는 방법은 적어도 수학에서는 없다. 우선 삼각형이라는 도형을 알아야 하고, 삼각형의 닮음 조건을 알고, 직각삼각형과 삼각비를, 좌표평면의 사분면을, 그런 연후에 삼각비를 이용하여 삼각형의 넓이와 높이 구하기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가장 단순한 삼각비에 대한 것이라도 반드시 단계마다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다. 지름길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닮았다와 같다는 다르다. 삼각형이 닮았다는 의미는 각 변의 길이의 비가 같고 대응하는 각의 크기가 같으면 닮았다고 한다. 삼각형의 닮은 조건은 세 가지다. 1- 두 쌍의 대응변의 길이의 비가 같고, 그 끼인각이 같을 때.(SAS-S는 대응변, A는 끼인각) 2-세 쌍의 대응변의 길이의 비가 같을 때(SSS) 3-두 쌍의 대응각이 각각 같을 때(AA-즉 세 각이 같을 떄). 삼각비란, 세 각이 같은 삼각형이 닮은 삼각형이라 할 때, 직각삼각형에서 한 각이 직각이고 다른 한 각이 같을 때, 삼각형의 비가 일정하다. 이때 일정한 삼각형의 비를 삼각비라 한다. 즉 직각 삼각형에서 세 각이 같다면 삼각형은 비율이 같다. 직각 이외의 한 각을 기준으로 삼는다.(기준각) 삼각형은 세 개의 변과 세 개의 각이 있다. 그리고 기준각을 정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변을 구분할 수 있어서다. 높이. 빗변, 밑변을 정할 수 있다. 삼각비란, 직각삼각형의 변의 길이를 이용하여 삼각형의 변의 길이, 각의 크기 등을 구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SINA=높이/빗변. COSA=밑변/빗변. TANA=높이/밑변. 기준각의 각도에 따라 이 세 삼각비의 값을 다 정리해 놓았다. 즉 각이 결정되면 삼각형의 크기와 무관하게 삼각비는 항상 같은 값으로 고정되어있다. 그렇기에 한 변의 길이와 각만 알면 빗변과 높이를 알 수 있다. 비율이 같으니까. 화학에서 주기율표와 같다. 이것을 이용하여 삼각형의 높이와 넓이 등을 구할 수 있다. 아주 높은 건물의 높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자를 가지고 위에서 아래까지 내려서 잴 수도 있다. 그러면 모든 건물의 높이을 이런 식으로 계측할 수는 없다. 이때 건물에서 20미터 떨어져서 건물 꼭대기까지 직각삼각형을 만들고 그 각이 60도라고 하자. 각 꼭지점을 ABC로 하는 직각 삼각형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기준각과 밑변의 길이다. 이것을 이용하여 높이을 알 수 있다. 밑변이라 TAN는 높이/밑변이고, 각은 60도이다. TAN60=높이/20이다.(높이를 AC↓) 그럼 AC↓=20*TAN60이다. TAN60의 삼각비는 루트3이다. 해서 20*루트3. 루트3은=1.732--. AC↓=20*1.732--. 높이는 34.64이다. 달과 지구가 수직이고, 달까지의 길이를 알 수 있다면 태양까지의 거리도 알 수 있다. 삼각형의 넓이 공식은 S=½absinC라고 한다. 삼각형을 우선 직각 삼각형으로 만든 후에 삼각비를 이용하여 넓이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유레카이다. 쭉 나열하였지만, 막상 문제가 주어진다면 쉽지 않을 것이다. 연습과 반복을 통해 계속 익히는 수밖에 없다. 도시에는 건물이 널렸고, 주위에는 늘 산이 있고 평지가 있다. 높이가 있고, 넓이가 있다. 하늘에는 달이 있고 태양이 있고 별들이 분포해 있다. 우리가 굳이 저 높이를 알고 평면을 분할하여 넓이를 알 필요가 있을까. 태양과 달의 거리와 별의 분포를 알 필요가 있을까. 세상은 온통 소리로 둘러싸여 있다. 그 소리를 분류하고 질서를 잡아서 누군가는 음악을 만든다. 도시에는 사람도 많고 차도 많다. 일상이다. 일상이란 당연한 모양이다. 그들 수학자나 예술가들은 그런 따분한 ‘일상’, ‘당연한 것’에 의문을 가지거나, 파고드는 부류일까. 왜. 왜?. ?

  • 진리의 말씀  : 법구경
    저자
    법정 옮김
    출판사
    이레
    발행연도
    2005
    작성자
    김**
    작성일
    2026.07.02
    평가점수
    평가점수

    3

    공감수

    <<법구경>> 법구 지음. 한명숙 옮김. 홍익출판사.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 언젠가는 내 눈에 피눈물 흘릴 날이 올 것이다.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같은 뜻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내가 어려서는 어른들게 이런 류의 말들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당연한 격언 같지만, 인간 세상에서 이런 금언이 당연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간의 노력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수학에서 음수가 발견되고도 음수를 수학적 수로 받아들이기까지는 1,600년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의 세태는 이런 격언이 낡고 오래되고 현실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리라. 차라리 요즘의 격언이란 성공하고 출세하면 최고의 선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와 개인을 중시하고 성공과 경쟁을 장려하는 산업화 사회의 처세는 이렇듯 다를지 모른다. 법구경은 부처님 사후에 불교계가 다섯 부파로 나뉘고 거기에 소속된 부파들이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여러 경전 중에 네 구절과 여섯 구절로 된 게송을 뽑아서 만든 경이라고 한다.
    저자는 옮긴이의 말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 구절을 매우 좋아한다. “죄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남의 덕인데, 꿋꿋이 고개 든 허세의 슬픔, 아픔에 가슴이 사무친다. 내색하지 않고 속아주는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 치열한 성공 지향 사회에서 이런 말이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법구경이 읽을 가치가 있을까. 회향품. 5장 몸이 병들어 야위어 가는 것은 활짝 핀 꽃이 떨어지는 것 같고.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여울에 휘감아 도는 물살 같구나. 질병과 죽음과 가난과 슬픔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인연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려 하고, 질병을 극복하려 하고, 가난을 벌레 보듯 혐오하고, 슬픔이 행복이 되지 못해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회에서 가능할까. 사실 쉽지 않은 일이리라. 그러나 태어나고 병들고 아프고 죽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들의 운명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회피하고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흔히 ‘건강한 노년’이라는 말들이 유행하는데, 사실 건강한 노년은 없다. 건강과 노년이란 어불성설이다. 건강하면 노년이 아니다. 아프고 질병이 걸리고 기억력도 감퇴하고 곧 죽음이 임박했기에 노년인 것이 아닐까. 우리 인간들은 이런 용어라도 만들어서 노년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장식하기를 원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생로병사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진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여야만 대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자칫하면 불교는 허무의 사상으로 흐를 위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지런히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라고 가르친다.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부지런히 훈련하고 공부하라는 의미와 상통하지 않을까. 다만 운동선수의 무대는 경기장인 반면 한 인간의 무대는 생로병사가 일어나는 ‘삶’이라는 무대이다. 이 ‘삶’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얻고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지도자나 멘토가 아니라 오직 너를 믿고 정진하라고 하는 듯하다. 정말로 선을 행하면 복을 얻고, 악을 행하면 죄를 받는걸까. 복이나 죄를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선은 좋은 것이고, 악은 나쁜 것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마음이 심란할 때 법구경을 간간이 읽는다. 처음 읽을 때는 ‘아가, 착하게 살아라, 남들 눈에 눈물 흘리게 하지 마라’ 하는 할머니 말씀처럼 들렸다. 시시하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을 선하게 살아라’ 하는 말 보다 더 중요하고 바른 말씀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되뇌게 된다. 나는 오늘 선하게 살았나 하고 묻게 된다. 나는 믿기로 하였다. 악하게 사는 것보다 선하게 사는 것이 더 좋다고. 그럼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인간의 정신사나 윤리에서 누천년에 걸친 논쟁거리인지도 모르겠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선이다. 부처가 선의 법을 규정하였다. 그럼 누구나 자기가 선하게 살고 옳게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시대는 그런 시대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의 선과 너의 선이 부딪쳐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세상이다. 선은 각자가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도로에서 운전할 때 교통신호를 각자가 마음대로 규정하여 운전하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혹은 사회에서 정한 교통 규칙을 준수하며 운전한다. 각자가 질주의 본능과 자유를 위해 교통규칙을 어기기 시작하면 운전자는 사고에 대한 불안과 긴장 속에서 남과 다투면서 운전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교통 규칙을 잘 지키며 운행한다. 그런데 정신이나 마음처럼 무형의 영역에서는 마음껏 질주하고 자유를 맘끽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은 혼란스럽고 우리는 늘 긴장과 불안에 시달린다. 현대의 가장 대표적 질병은 우울증이라 한다. 부처님은 사상이나 정신의 교통 규칙을 정한 자라고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불교하는 집단을 형성하였지 않았을까.

    가끔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을 때 내가 불교적 세계관에 많이 물들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내가 하는 말과 생각하는 방식 등이 그럴지도 모른다. 많이 읽지는 않지만, 가끔 불교의 경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물들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내가 종교로서 불교를 대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단지 사상으로서 불교를 대한다. 그리고 불교의 경을 가끔 읽는 이유는 부처의 가르침을 읽는 것이 즐겁고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에 읽으리라. 뭔가 매력이 있다. 세상의 모든 책들이 그렇지만, 특히 무슨무슨 경이라 쓰인 책들은 반복하여 읽어야만 할 것 같다. 경은 이론서나 기술서도 아니고 문제집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럴지를 짐작해 보면 경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무수한 반복을 통하여 몸과 하나가 되어야만 비로소 경을 이해하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무도인은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무수한 반복 훈련을 통해 동작이 자연스럽게 몸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똑같은 발차기를 수만 번 훈련하여 몸과 하나가 되게 한다. 좀 더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무슨무슨 경은 실천의 문제이지, 이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구경을 읽을 때면 조급해하지 말고 반복해서 읽다보면 즐거움이 있다. 그렇다고 자구를 무조건 외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해하고 의미를 하나씩 알아가면서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책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부처의 가르침의 만분의 일이라도 깨달아 대자유를 맛보지 않을까. 남들과 다투지 않고 욕망에 치를 떨지도 않고, 돈과 권력을 탐하느라 피로에 절지도 않고, 행복과 성공을 쟁취하고자 사투를 벌이지도 순간의 기쁨과 슬픔에 속지도 않고 담담하게 인연대로 살아가고 싶다. 모든 중생들이 안락하게 살아가기를, 내색하지 않고 속아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활 만드는 사람은 활을 다루고 뱃사공은 배를 다루며
    목수는 나무를 다루지만 지혜있는 사람은 자신을 잘 다룬다.
    명철품. 7장

  • 셔터우의 세 자매: 천쓰홍 장편소설
    저자
    천쓰홍 지음 ; 김태성 옮김
    출판사
    민음사
    발행연도
    2026
    작성자
    김**
    작성일
    2026.06.28
    평가점수
    평가점수

    3

    공감수

    <<셔터우의 세 자매>>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민음사
    소설을 한 편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았다. 가끔 소설을 읽긴 하지만, 드물다. 천쓰홍은 대만 작가인데, 대만을 넘어 꽤나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나는 그 이름도 한 번 들어보지 못했다. 정기구독하는 시사인 잡지의 문예란에서 소개되었기에 읽게 되었다. 요즘은 여러 책을 동시에 읽는 경우가 많다. 직장에서는 몇 달째 칼마르크스의 자본 1권을 읽고 있다. 직장에서 쉽게 틈이 없기에 속도가 더디다. 최근에는 법구경을 책상 모서리에 놓고 한 장씩이나마 들여다보고 있다. 며칠 전에는 기세춘, 신영복 선생이 편력한 중국역대시가집을 구매하여 들춰보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이 힘도 많이 들고 내가 그닥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생계 활동 말고 따로 취미가 없기에 읽고 있다. 다른 것을 좀 배웠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인간관계의 폭도 협소하고, 여행을 자주 간다거나, 맛집이나 다른 것에 흥미가 없기에 달리 방법이 없다. 혹자는 좋은 팔자라고도 하고 혹자는 가련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남들 시선이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무모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지금 이렇게 뭔가를 쓰고는 있지만, 이것은 몸에 익은 습관적인 행위이지, 이 소설에 대해 딱히 쓸 게 있어서 쓰는 것은 아니다. 많이 무기력해졌고, 때때로 공허감이랄까 허무의 감정이 많이든다. 그럴 나이가 되어서 그러는지, 괜시리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유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원인은 끝도 없고, 핑계도 무한하다. 옛말에 처녀가 애를 가져도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 편하고,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사연이 있는 법이고, 다들 자신의 사연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아닌가. 이런 상태를 방치하고도 삶은 계속되겠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한 가지 처방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습관의 힘으로 살아가자. 아침에 일어나 씻고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식사 후 산책을 하고 책을 읽고 쓰고 하는 것을 의도나 의지가 아니라 습관화하자. 내가 살아가는 힘은 점점 고갈되어간다. 대신 습관의 근육을 키우자.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생계 수단을 잃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삶의 중요한 습관 혹은 의례을 한 가지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패턴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 살아간다는 일은 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일은 습관을 지키고, 습관을 갱신하며 지속하는 물리적 사건이 아닐까. 지구라는 행성이 수억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까닭은 중력과 공전과 자전의 습관의 힘이 아닐까. 지구라는 생명테가 매일 열정과 의지를 가지고 자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읽어야 하고 써야 한다. 생물학에서는 물질대사이다. 나는 이것을 문학적으로 온고지신이라고 이름을 붙여본다. /자본론/을 읽다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칼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기술했을 것이다. 책의 상당 부분은 그래프와 통계자료로 도배를 하였으리라. 그런데 자본론은 마치 이야기 같다. 그 이유는 당시에 아직 통계나 그래프 같은 수학적 방법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서, 많은 것을 글로 풀어야 했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본론/은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이고 문학적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용은 차치하고 읽는 재미가 있다. 신화나 무속은 우주나 인간을 설명할 충분한 수단이 없었기에 채택된 방식이 아니었을까. 번개나 폭풍이나 홍수를 설명할 과학이 부족하거나, 인간들의 삶의 부조리나 이해 불가한 사건을 해석할 지식이 부족하다면 나 또한 신화나 무속이나 종교적 설명의 방법을 발명하였으리라. 그렇다고 신화나 종교가 과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 인간들의 표현 방식이고 세계를 해석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고, 지혜의 보고일 수 있다. 우리들의 삶은 방정식이나 그래프로만 설명될 수 없는 그 너머가 있지 않을까. 소설이라는 장르를 한 번 생각해 본다. 소설은 인간사를 글로 풀어내는 장르다. 언어의 예술이다. 한 때는 시가 언어의 예술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라는 장르가 사라져가고 있다. 소설도 시의 운명을 따르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 지위는 날로 쇠퇴해 가리란 예측은 대부분 동의하는 것 같다. 지금은 보는 시대이지, 읽는 시대는 확실히 아닌 듯하다. 소설이라고 모두 읽는 용도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 점점 보여주기 위한 소설이 새로운 표현양식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읽는다는 행위는 뜨게질 같은 수작업이 아닌가도 싶다. 내가 가끔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슨 교훈을 얻기 위함도, 삶의 지혜, 정보, 즐거움을 위함도 아니다.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 낭비다. 뜨개질을 한다는 심정으로 읽는다. 뜨개질의 습관을 이어가기 위함이다. 가야 할 곳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다고 하지만,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습관, 패턴, 의례.

    <셔터우의 세 자매> 타이완의 중부의 실제하는 한국의 군 단위 정도의 지역이라 한다. 여기 이상한 세 자매와 그들의 이웃들이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이상한 이야기고, 셔터우도 이상한 지역이다. 거기에는 역사가 있고, 신화가 있고, 무속이 있고, 비루한 인간 군중이 있고, 매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게 그들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싸우고, 속이고, 위선 떨고, 죽는다. 또 태어나고 죽고 이상한 행동들을 하며 살아간다. 소설을 어떻게 평가하고 감상해야 하는지 알 수 없기에 이렇게 밖에 쓸 수 없다. 내 감정을 하나 더 얹어보아야 그것이 무슨 객관적 관점일 수도 없고, 너절한 감상을 적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한 ‘보편적’이라는 의미가 그 의미를 잃어버린지 오래인데, 굳이 ‘보편적’ 인 무엇을 찾으려고 괜히 노력해 본들 무순 소용이 있겠는가. 다음에 또 소설을 읽을 기회가 생기면 천쓰홍의 소설을 꼭 다시 읽어보고 싶기는 하다. 즐거운 읽기였다.

  • (한켈이 들려주는)정수 이야기
    저자
    박현정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연도
    2012
    작성자
    김**
    작성일
    202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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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켈이 들려주는 정수 이야기>> 박현정 지음. 자음과 모음.

    음수가 수학사에 등장한 지 1,600년이 지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수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정수란, 자연수에 0과 음수를 더한 수의 개념이다. 곧 정수란 음수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은 사소해 보이고 당연한 것들이 사실은 긴 시간과 노력의 축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다. 수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겸손해야 하고,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삶은 내가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은 후에도 면면히 흐를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삶을 열심히 살고, 나머지는 ‘세계’에 맡겨야 한다. 우리가 수학을 배운다는 의미는 단순히 계산을 하거나, 시험을 보기 위한 용도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수학은 인류 문명의 거대한 창고다. 그동안에 위대한 수학자들이 즐비하였는데, 왜 19세기가 되어 한켈이라는 수학자에 의해 진정한 수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졌을까. 한켈은 음수를 양의 개념을 설명하는 자연수나 실제적인 것을 나타내는 대상이 아니라, 형식적인 구조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과학사로 보면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은 ‘불가능한 수’, ‘상상의 수’,.‘허수의 하나’, ‘거짓 근’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모두 양의 개념으로 음수를 정의하고 사용하려고 하였지만, 양의 개념으로는 진정한 수학적 개념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고 한다. 즉 양이나 실제적인 대상으로 음수를 증명하고 설명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이에 한켈은 음수를 순전히 형식적으로만 설명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음수를 형식적인 구조(대수적 구조)의 개념으로 보았다고 한다. 사실 수학을 수의 학문이라 알고 있지만, ‘형식’ ‘구조’ ‘패턴’ ‘사유의 방법’과도 연관이 깊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수학이 그렇게 단순한 학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형식적 구조라는 개념은 결코 쉬운 개념은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높이가 있으면 깊이가 있고, 동쪽의 반대는 서쪽이고, 오른편의 반대는 왼편이고, 있음의 반대는 없음이다. 맞는지 모르지만, 자연수 2은 실제 존재하는 양이다, 그러나 음수 2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수 2에 대응하는 음수 –2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형식적 구조로서 있다고 할 수 있다. x+5=1을 설명하기 위해 음수를 인정하고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수의 사칙연산은 이 형식적 구조와 어떤 연관을 맺을까. 누구나 x+5=1에서 x를 구하라고 하면 –4라고 즉답할 수 있지만, 이건 음수가 정의되고, 증명된 후에 공식화되면서 나온 계산이다. 그럼 음수를 형식적 구조로 보고 하는 정수의 사칙연산은 어떠할까.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5+(+3)이 왜 –2가 되는가. -2가 실제하는 것도 양도 아닌데, 이런 방정식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가?

    정수의 사칙 연산을 하기 전에 몇 가지 개념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수직선은 직선 위에 원점 0을 기준점으로 오른쪽은 양수, 왼쪽은 음수를 대응시킨 직선. 절댓값은 수직선에서 점과 원점 사이의 거리. 절댓값이 a인 수(a>0)는 +a와 –a의 두 개가 있다. 수의 대소 관계 음수<0<양수. 양수는 절댓값이 큰 수가 크고, 음수는 절댓값이 큰 수가 작다. 수학은 어떤 약속을 정해야 하고, 조건이 맞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전제 조건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수학에는 빠른 길은 없다. 정수의 덧셈과 뺄셈은 위의 수직선의 정의를 바탕으로 가능하다. 우선 수직선을 긋고 원점 0을 정한다. 원점 0에서 거리만큼이 절댓값이다. 동쪽을 양의 방향, 서쪽을 음의 방향이라 정한다. 수직선 위 거리와 방향이 정수의 덧셈과 뺄셈이다. (+6)+(-4)=+2 여기에서 +, - 기호의 형식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이 식이 의미하는 바는 수직선의 원점에서 동쪽(양의 방향)으로 6을 간다. 여기에 더해 –4 (즉 이미 간 6을 원점으로 서쪽(음의 방향)으로 4를 간다. 그러면 위치가 +2(동쪽 양의 방향 2에 놓인다)이다. (-3)+(-2)=-5란, 원점에서 서쪽(음의 방향)으로 3(거리)를 간다. 여기에 더 해 서쪽으로 2만큼 더 간다. 그 위치는 –5자리이다. 음의 방향 5이다. 음수는 양수의 상대적인 개념이고, 수학적 구조를 위해 형식적으로 받아들인 수라고 생각해야 한다. +가 거리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 부호는 차이를 나타낸다. (-4)-(-1)=3 수직선 위에 –4위치와 –1위치를 표시하고 그 차이(절댓값의 차이)는 3칸이다. -1-(+3)=4 원점에서 동쪽(양의 방향)으로 3과 원점에서 음의 방향 –1은 -(차이)가 4이다. -1-(-4)=3이고 이것을 +로 나타내도 값은 같다. -1+4=3이 된다. 수학의 매력은 기호와 규칙의 발견이라고 한다. 뺄셈은 덧셈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 -1-(+3)=-4 다. 이를 –1+(-3)=-4로 바꿀 수 있다. -1-(+3)=-4은 확신할 수 없지만, -1에서 음의 방향(-)으로 +3를 한다는 의미인 듯 하다. 우선 이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그럼 6+(-7)=-1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 -를 수식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기호로 이해해야 한다. +가 ++++++6개가 있다. -가 -------7개가 있다. 이것을 서로 지워나가면 – 한 개가 남는다. 해서 –1개 남는다로 표시한다. 우선 이렇게 단순하게 이해하기로 하였다. 그럽 정수의 곱셈은? (-3)(-4)=12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곱셈을 시간과 속력의 관계로서 설명하고 있다. -5*3=-15란. 한 시간에 음의 방향으로 5(-5)씩 이동하면 3시간 후의 위치는 –15가 된다. 여기서 +3인 양수이고 양수는 ‘후’라고 할 수 있다. 그럼 –2*(-3)=6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음의 방향으로 시간 당 2를 가는 것이므로 음의 방향으로 2를 세 번 온 것이 0이라고 한다. -는 ‘전’을 나타내니 –3은 세시간 전의 위치를 묻는 것이라고 한다. 서쪽은 음의 방향이고, 시간의 흐름에서 ‘전’이라는 개념은 음의 개념이라고 한다. 이해하기가 수월하지는 않지만 반복 연습을 통해 이런 사고 방식을 익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규칙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닌 듯 하다. 나눗셈을 공부하기 전에 역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역수란, 두 수의 곱이 1이 될 때, 한 수를 다른 수의 역수라 한다. 나눗셈은 생략한다. 내 언어로 셜명하기가 쉽지가 않다. 다만 나눗셈은 곱셈식으로 고칠 수 있다고 한다. 차차 알아갈 수 있으리란 희망만 가져본다.

    매 번 복습한다는 기분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명징하게 이해한 적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라도 어렴풋이 이해하는 것이 생기면 매우 기쁜 것도 사실이다. 수학은 따뜻한 학문이 아니라, 냉정한 학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한 편으론 따뜻함은 냉정함에서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열정은 생활에 활력을 줄 수 있겠지만, 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냉정한 사고가 아닐까도 싶다. 이는 수학책을 읽을 때와 다른 책(예를 들면 문학)을 읽을 때의 차이와 같다. 다른 책은 나를 위로할 수 있고, 괜찮다고 할 수도 있고, 약간 흐릿한 상태에서 읽을 수도 있지만, 수학책을 읽을 때는 순수하고 좀 더 명징한 상태로 읽지 않는다면 거의 읽을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내가 수학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생활이 덜 복잡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복잡한 생활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의도일 수 있다. 지금은 열정이 아니라, 냉정을 찾아야 할 시대가 아닌가 싶다.

  • 그림을 보는 기술 : 명화의 구조를 읽는 법
    저자
    아키타 마사코 저 ; 이연식 옮김
    출판사
    까치
    발행연도
    2020
    작성자
    김**
    작성일
    202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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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보는 기술(명화의 구조를 읽는 법)>> 아키타 마사코. 이연식 옮김. 까치

    “이 세상은 누구도 관찰하려고 하지 않는 것들로 가득하다”

    누구나 보고 읽는다. 하지만 보는 것과 생각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닐까. 이 책을 만난 것은 우연한 행운이자, 도서관의 힘이다. 자꾸 쌓여가는 책들이 번거로워 요즘은 도서관에서 대출을 한다. 이 책을 우연히 접하고서 구매 자제 결심을 바꿨다. 이유는 이 책은 기술에 대한 책이기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다. 측량 기사가 측량기를 매 번 빌려서 사용할 수 없는 사정과 같다. 기술이란 단어나 도구나 수단의 의미로 많이들 받아들이지만, 내 생각에 기술은 예술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기술의 어원을 검색해 보면 “인간의 이성과 손을 사용해 목적을 이루는 유용한 방법” “무언가를 만드는 실천적인 이성이자 학문” 같은 의미라고 한다. 아트(예술로 번역)도 또한 인간의 숙련된 기술이나 기예“ 등을 지칭한다. 이런 식으로 사용되다가 18세기에 실용적인 기술과 미적 가치를 지닌 ‘아트’를 구분하기 시작하여 ‘아트’가 ‘미술’이나 ‘예술’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두고두고 참고할 ‘기술’서적으로 생각하여 구입하였다. 사전을 필요에 따라 대출하여 사용하지 않고 늘 책상머리에 두고 사용하듯이 그림을 볼 기회가 생기면 먼저 들춰볼 생각이다. 책을 들고 그림을 보거나 미술관에 갈 수 없기에 여기에 큰 제목만 요약하여 인쇄하여 들고 다녀 볼 생각이다. 시시때때로 이 ‘기술’을 익혀보고자 한다. 지금은 거의 가지 않지만, 예전 한 때는 미술관엘 가끔 들리곤 했다. 그림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자주 눈에 익히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많이 본다고 ‘아름다움’을 알 수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감성’도 키우고, ‘지식’도 넓히고 하는 노력들이 없다면 안목은 생길 수 없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관찰’을 추가해야 한다. 관찰의 힘을 기르고, 관찰의 기술을 익혀서 반복 연습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가까운 사람들(현대인)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다들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맘에 드는 것이 당신에게 예술이다“ 참 무책임한 답변이 아닌가 싶다. 은근히 화가 날 때도 있다. 개인의 감정 기복에 예술이나 아름다움을 맡겨도 될 만큼 예술은 가치가 없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어떤 건물을 보았을 때 그 외관이나 디자인만 보고 개인의 취향에 평가를 맡겨버리는 꼴이다. 하나의 건축물에는 사실 엄청난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싶다.

    이 책은 여섯가지를 눈여겨 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제 1장은 이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초점에 대한 관찰이다. 초점이란 ”집중되는 지점“으로,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한다. 초점을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서 화가가 그림에 담은 의도와 주제를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제 2장은 명화가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이유는? 경로를 찾는 기술에 대한 장이다. 화면안의 경로를 찾는 기술이다. 회전형 구도, 지그재그 구도, 방사형 구도, 그 외 복합적인 경로를 찾는 기술의 장이다. 제 3장은 ”이 그림은 균형이 좋다“란 무슨 뜻인가? 균형을 보는 가술의 장이다. 선의 균형, 좌우 대칭의 그림, 좌우 비대칭의 그림. 제 4장은 왜 그 색인가? 물감과 색의 비밀에 대한 장이다. ‘회화’는 물질로 이루어 진다. 컬러 스킴을 보자. 제 5장은 명화의 배후에는 구조가 있다. 구도와 비례에 대한 관찰 기술에 대한 장이다. 위치가 보여주는 힘의 관계, 숨겨진 십자선과 대각선, 등분할 패턴, 정사각형, 직교, 황금비, 사등분에 숨겨진 깊은 의미. 제 6장 그래서 명화는 명화이다. 통일감에 대한 장이다. 종합적 분석에서는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리심>이라는 그림을 놓고 분석을 한다. 1-초점과 명암 스킴, 2,시선 유도, 3.리니어 스킴과 균형, 4.색 5.배치 저자는 이렇게 마무리 한다. ”자신의 좋고 싫음“과 작품의 ”객관적인 특징“을 나눠서 감상할 수 있게 되면, 즐길 수 있는 폭이 넓어질 것이라고 한다. ”명화는 왜 명화라고 할까요.-----지금까지 보려고 하지 않았던 진실이 반드시 보일 것입니다“ 너절하게 이 책을 그대로 소개하는 이유는 이 책이 기술서적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취향, 감상의 문제 이전에 배우고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런 생각이 가끔 든다. 삶을 사랑하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것도 기술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내가 아무리 근사한 설계도나 조감도를 가지고 있든, 열정과 풍성한 감성과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든, 삶은 ‘건축’되어여 바로소 삶을 사는 것이다. 삶은 ‘기술’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조금씩 이 기술을 익힐 수 있고, 익혀야 한다. 초보자인 나는 우선 몇 가지 키워드를 메모하여 미술관을 찾아 볼 생각이다. 초점. 경로. 균형. 색. 구도와 비례. 통일감. 반복하여 익히면 이 항목도 풍부해지리라. ‘아름답다’는 것은 좋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왜 ‘선’하게 살아야 할까. 그것이 좋은 것이라 그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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